서울경제 (14.06.24) [수요 산책] 한 뭇을 남겨두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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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na 작성일14-10-01 11:25 조회1,3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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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산책] 한 뭇을 남겨두는 사람들
이희용 다애 다문화학교 교장
입력시간 : 2014/06/24 20:18:09
수정시간 : 2014/06/24 20:18:09
 
 
그렇게 밥을 잘 먹던 몽골 출신의 T모군이 점심시간에 밥을 안 먹고 울상이었다. 이가 너무 아프단다. 충치를 방치하다 치통이 너무 심해졌던 것이다. 경제 형편이 어려운 아이였기에 사방에 치과 의사 선생님을 수소문해 경기도 분당에 있는 어느 치과를 소개받았다. 한 달 남짓 병원에 다니며 신경 치료를 받고 문제가 된 치아를 씌우고 나서야 치료는 끝났다. 필자가 치료 마지막 날 그동안의 치료비를 내려고 간호사에게 진료비를 물었더니 치과원장은 그냥 보내드리라고 했다는 것이 아닌가. 너무 죄송하고 고마워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했더니 원장은 잠시 진료실 밖에 나와 얼굴만 살짝 보여주고는 그냥 가라는 말만 남겼다. 나중에 알아보니 의료보험이 없어 수십만원의 비용이 드는 치료였다는데 의사 선생님은 T모군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그 날 나는 평소 의사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을 버렸다.

다문화가정에 손길 내민 이 많아

S군은 겨울방학 중에 친구들과 건대입구역 근처에서 밤에 길을 걷다가 한국 아이들 10여명에게 집단 폭행을 당했다. 가해자들의 구둣발에 짓밟힌 아이의 얼굴은 검붉은 피멍으로 퉁퉁 부어 있었다. 그런데 S가 겨우 붙잡아 마침 인근을 지나던 순찰차에 인계한 가해자는 치료비 지불을 미루고 도리어 억울한 누명을 씌워 그를 경찰에 고발했다. 나이 어린 중학생이 강력계에서 조사를 받게 되자 S는 몹시 두려워했다. 외국에서 온 자신이 한국에서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다며 절망했다. 소식을 들은 필자는 평소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멘토 역할을 해주던 강남경찰서에 도움을 청했다. 경찰관의 도움으로 다행히 S의 억울한 혐의는 벗겨졌고 결국 가해자로부터 치료비도 받을 수 있게 됐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을 싫어하고 원망하게 될 뻔했던 S군은 한국을 믿고 사랑하게 됐다며 웃음을 되찾았다.

열대 지방에서 한국으로 이주한 중도입국 청소년들에게 한국에서 첫 번째 맞는 겨울 추위는 가히 살인적이다. 대부분의 다문화가정이 반지하나 지하 방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처음 멋모르고 가스 보일러를 따뜻하게 틀었다가는 한 달 뒤에 입이 쩍 벌어지는 요금 폭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 매서운 요금 폭탄에 놀란 부모들은 그 뒤로 가스비를 아끼기 위해 낮에 난방 보일러를 꺼놓고 지내는 경우 많은데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감기를 달고 산다. 이런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위해 후원금을 내주신 K 변호사님 덕분에 아이들은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었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해 남겨두라 (성경 신명기 24:19)"

이 말씀에 따라 다문화가정 학생들을 위한 위탁형 대안학교의 문을 연 지 올해 4년째다. 뭇(sheaf)은 볏단을 세는 단위로서 '한 뭇'은 얼마 되지 않는 양이지만 어려운 형편의 이웃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양식이 아닐 수 없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다문화가정 학생들을 교육하다 보니 '보육'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밤늦게 귀가하고 아침 일찍 나가는 맞벌이 부모 때문에 아침 식사와 저녁 식사를 제대로 못하는 아이, 뇌전증이 발병했지만 의료보험이 없어 병원을 가지 못하던 아이, 교통카드 잔액이 다 떨어져 학교를 못 오는 아이 등 아직도 이 땅에서의 삶이 힘든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많다.

살 만한 세상으로 내딛는 한 걸음

그런데 이 아이들을 위해 이런저런 분들을 만나다 보니 이타적 가치관을 실천하며 그것을 보람으로 여기는 의료인·법조인·회사원·기업인·주부·동문회·경찰관이 밤하늘의 별처럼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들이 남겨 둔 수많은 한 뭇들로 인해 이 땅의 나그네들이 힘을, 용기를 얻고 있으니 그들은 진정 사막에 내리는 새벽이슬과도 같다. 신문이나 TV에 그들의 이야기가 자주 보도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존재를 모를 수 있지만 그들로 인해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들은 밝아지고 살 만한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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